[논현]런던의 시간이 쌓인 곳 <퇴근길 여행 한 컵>

에디터 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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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동 | 67 Soho



시간이 SNS 타임라인처럼 지나간다. 방금 본 영상은 5분도 못가 잊혀지고, 트렌드는 점점 빠르게 변한다. 이대로 가다간 경험은 휘발되고, 경력은 쓸모없어질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을까. 떠나기로 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빈티지숍이 줄지어 있는 전통의 도시, 런던으로. 퇴근길에 떠난 서울 속 런던은 221B가 아닌 논현동67번지에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떠나기로 했다에서 이어집니다.

 
67 Soho의 시그니처 메뉴인 에그 크레이프

첫 만남은 인스타그램이었다. 유명한 가게라는 건 알았지만 #67Soho를 검색하면서도 에그 크레이프 사진 2,000장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픈 2개월차에 이 정도 관심을 받고 있는 공간을 볼 때면 반신반의하게 된다. 하지만 박수지 대표가 개인 계정에 포스팅한 크루 채용공고는 내 의심을 거두기에 충분했다.


“소호가 시간 채우고 가는 그런 일터가 아니라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요리, 스타일링, 일하는 마음가짐 등 제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어 드릴게요. 이건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니 믿음이 갔다. 그러고보니 가오픈 기간에 방문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수지 대표의 이름을 언급했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이미 이름을 알린 박수지 대표 개인의 커리어는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이제 시작 단계인 67 Soho라는 공간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이 공간에서 나누게 될 대화가 나 같은 사회초년생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이룬 것보다 이루고 싶은 게 더 많은 사람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서. 



아침 기온이 6도로 떨어진 날, 논현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10월 초입에는 예상치 못한 날씨다. 쌀랑한 바람을 맞으며 가게 앞에 도착하니 빈티지 가구와 조명으로 채워져있을 공간이 유난히 따듯해보였다. 고풍스러운 글씨가 쓰인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건 창가의 긴 테이블이다. 오늘처럼 햇볕이 귀한 날 자리잡고 앉아 여유롭게 쉬기 딱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창밖에 볼 것도 없고 공간활용도도 떨어지는데 뭐하러 이렇게 긴 테이블을 놓냐고. 그래도 박수지 대표는 완고했다. 런던의 한 카페 창가에 앉아 광장을 본 순간, 눈물을 흘릴 만큼 행복했던 기억을 잊지 못해서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 1년 동안 230개의 레시피를 만들 정도로 일에만 몰두하다가 툭!하고 놓아버린 여행이었다. 내내 조여있던 긴장을 풀고 쉼이 주는 행복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이런 느낌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바로 그날 Soho의 Fernandez & Wells에서 느꼈던 감정과 분위기, 공간의 특징을 노트에 적어나간 기록이 지금도 67 Soho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가구에서 런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단골가게인 영국 빈티지 전문 숍 The Old Cinema가 가게를 정리할 무렵, 67 Soho가 오픈하면서 테이블과 의자를 들여온 덕이다. 서울에서 영국의 분위기를 재현하겠다는 마음이 시간을 넘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흔한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다. 실제로 1980년대에 박수지 대표의 아버지가 영국의 Delyn에서 직접 받아온 훈장

 

67 Soho의 가구와 소품에는 긴 호흡의 세월이 묻어있지만, 그녀는 30분이 아까울만큼 시간을 촘촘하게 쓴다. 3일 전에 도쿄 출장을 다녀와서, 하루 전에는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 촬영 스케줄을 소화했고, 오늘은 카페 신메뉴를 선보였다. 인기 메뉴에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변화를 만들어내며 성장하는 것이다. 그 동력이 궁금했다. 자신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정체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왔지만 정작 67 Soho 내부는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했다. 마치 소설 <셜록 홈즈>는 클래식이지만 드라마 <셜록>의 연출과 영상미는 완전히 새로웠던 것처럼. 어쩌면 시간의 힘을 견뎌낸 가치를 내 안에서 찾겠다는 발상 자체가 안일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성장을 말하면서 사실은 안정감을 취하고 싶었던 속내를 스스로에게 들킨 것 같다.



한 가지 아이러니는 그녀가 손님들에게 쉼을 제공하면서 정작 자신의 여유는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카페를 찾아갔던 날, 오픈 이후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아침밥을 차려줬다고. 김치찌개를 끓이고, 명란을 쪄서 차린 소박한 밥상에 가족들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고 말하는 그녀가 정말 대단해보였다. 힘들지만 즐겁고, 동시에 놓치는 것들이 많다는 말에 나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모든 걸 쏟아부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성취감과, 얽매이지 않고 부유하는 즐거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만의 중심을 잡아가야겠지만, 완전한 균형이라는 게 정말 있긴 할까. 그래도 한 가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녀가 나눔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요리를 취미로 시작해 이웃들과 나눴던 순간부터, 음식이 나가기 전에 그릇부터 덥히는 지금까지. 푸드 스타일리스트. 주부. 카페 사장. 67 Soho라는 브랜드의 대표. 뭐라고 부르든 ‘먹는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음식을 나눈다’는 태도만큼은 변함이 없다. 태도는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이자 공간의 디테일을 만드는 비밀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성장을 이끄는 것은 태도다.
정체되지 않고, 따듯한 음식을 나눈다는 태도가 여전히 한 사람을 성장시키고 있는 것처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태도는 뭘까. 그걸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쉽게 답이 나오는 질문은 아니지만 고민할 가치는 충분하다. 마침 다음 일정은 사진책방이다. 찍는 사람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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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도산대로30길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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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